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종식시킨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끝낸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 황산대첩비지
#코로나19_끝나면_가볼만한여행지 #남원_역사속으로_황산대첩비지
전북 남원시 인월면 화수리 람천을 가로지르는 대첩교에서 황산대첩비터를 바라봅니다.지금으로부터 540여 년 전인 1380년 9월 람천은 한동안 피가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에 진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나세, 최무성 장군이 개발한 함포 등으로 무장한 고려 수군에게 군함 500여 척이 몰살된 뒤 내륙으로 도망친 일본군을 이성계 장군의 고려 정예군이 이곳에서 몰살시켰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황산대첩비지가 있고 오른쪽에는 가왕 송흥록, 박초월의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 뒤에 있는 국악성지에는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진포에 상륙한 일본군 잔당을 소탕한 황산(698.7m)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열리고 봄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데도 머물지 않도록 사심 없이 흘러만 가고, 천박한 구름에 싸인 황산대첩비지는 마치 일부러 조성한 듯한 구름처럼 보인다는 것이 미스터리입니다. 앞에는 람천이 흐르고 뒤에는 구름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명당으로 1577년 조선 선조가 황산대첩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세웠습니다.
황산대첩비지는 사적비각, 대첩비지, 파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씩 보면서 황산대첩이 갖는 의미를 알아볼까요?
황산대첩사적비는 1882년 고종 19년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운 것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왼쪽에 파손된 당시의 비각이 있습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의 전황과 비각 건립의 취지가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비석은 1958년 다시 세원비각비에 쓰러진 사적비는 일본식민지시대 황산대첩비와 함께 파손되었습니다.황산대첩비입니다.1380년 8월 고려 말 진포(지금의 금강 하구)에 정박한 500여 척의 왜선을 해도원수 나세, 심덕부, 최무선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최무선이 개발한 함포를 앞세워 모든 것을 불태운 진포대첩이 있었습니다. 당시 내륙에서 약탈행위를 하던 일본군은 돌아갈 배가 불타버리자 충북 옥천으로 이동해 이미 다른 곳에서 약탈행위를 하던 일본군과 힘을 합쳤고, 이후 상주까지 이동하면서 가는 곳마다 마을을 모두 초토화시켜 백성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는 기세를 이어갔습니다.상주에 있던 왜군은 계속 구미와 성주 등 경상 북도 지역을 유린하고, 경상 남도 함양군에 이르렀습니다.고려의 내륙 깊은 곳을 마음대로 횡행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며 정 잔디, 흰색 극렴들 9명의 장수 가 1만 여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함양군의 사근 내 역 전투에 참가했지만 참패하면서 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당연히, 함양은 초토화 되고 여덟 랑치을 넘어 호남으로 진격하고 남원 산성을 공략했는데, 남원 산성의 수비가 완강하고 여의치 않으므로, 운봉을 초토화하는 인계월에 진을 구축했습니다.당시의 상황을 “고려사절요”에서는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에 군, 현을 두드리고 함락시키고 살육과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왜적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3번 연해의 땅은 쓸쓸한 빈.왜란이 있은 후 지금까지 이처럼 잔혹한 것은 또 없었다”라고 쓴 것이니 그 참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딱따구리가 집을 세우기 위해서 곳 곳에 판 대첩비 각의 기둥, 결국 고려 조정은 이·성게 양 김광준, 청라, 윤경 씨의 3길 순찰사에 임명하고 이·성게는 여기저기에 흩어진 시신으로 초토화된 마을을 지나가면서 분노에 떨며 음식도 제대로 먹기 힘들었대요.이성계는 남원에 도착하고 하루 쉰 뒤 다음날 바로 여자 원치을 넘어 운봉에 도착하고 2일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지리산의 방향으로 달아난 일본군이 100여명밖에 없을 정도로 대승을 거둔 것이 황산 대첩입니다.노획한 왜군의 말에서 1600여마리에서 황산 벌(벌)의 램 강이 한주 동안 피가 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황산 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진포 대첩의 패전으로 내륙으로 진출한 왜구가 토착 세력화하는 것을 막고 30년 왜구에 시달린 고려 정부에 이성계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고, 훗날, 위화도 회군에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황산대첩비파비각입니다. 1577년 전라도관찰사 박계현의 요청에 따라 선조가 200여 년 전 조선 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여 세운 대첩비로 1667년 현종 때 비각을 세우고 1882년 고종 때 중건되어 인근에 어휘각을 창건하였습니다.하지만 황산대첩비는 현재 여러 개의 두 동강이 난 채로 파비각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5년 1월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모여들어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당시 일본이 이곳에 황산대첩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45년까지 그대로 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자신의 조상이 황산벌에서 몰살당한 것을 기념하는 조선의 대첩비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일본이 멸망하고 있던 1945년 1월에 이르러 파괴한 것은 아마도 자신들도 곧 패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1957년 황산대첩비 보수 당시 파손된 부위를 조합하여 옛 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게 새로 만들어 황산대첩비에 보존되고 파괴된 황산대첩비는 이렇게 파비각을 세우고 후세에 일본의 멸망을 알리기 위해 보전한 것입니다.황산대첩비지에서 나와 어각각에 왔습니다.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은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을 황산대첩 이듬해인 1381년 석벽에 새긴 유적으로 1945년 1월 일제강점기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의 황산대첩비 파괴 당시처럼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습니다.석벽에는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8명의 장군과 4명의 종사관 명단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공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문자를 일본의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전각을 폭파하여 정으로 찔러 찌그러뜨리고 총으로 쏴 문자를 식별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황산대첩비터가 있는 곳의 마을 이름은 비전마을로 ‘비가 전해온 마을’ 또는 ‘비가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 황산대첩비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볼 수 있었고, 수만의 왜구를 몰살시킨 역사의 현장을 함께 본 유익한 남원여행이 되었습니다. 인근에는 남원, 구례, 순창 등 지리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국악의 동편제가 시작된 판소리 ‘중시조 가왕’의 송흥록과 박초월의 고택이 복원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면 더욱 유익한 남원여행이 될 것입니다.글,사진=김정아글,사진=김정아